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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역사

  • 관리자
  • 조회 11729
  • 캄보디아
  • 2016.10.06
 

선사시대
 
선사시대에 캄보디아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던 흔적은 있으나 초기의 거주자들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초기 거주자들의 근원과 시기에 대한 추정도 정확치 않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거주자들은 쌀 농작, 소 가축,
금속 사용 등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초기의 정착지로 확인된 지역은 밧땀방(Battamabang) 지역으로 약 6천년 전에 인간이
거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거주자들은 동굴에 거주했으며 돌을 다듬는 기술과
도자기에 대한 조각과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두 번째 선사시대에 거주한 지역으로는 꼼뽕 참(Kompong Cham) 지역의 저지대로 기원전
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콤퐁 참 지역의 거주자들은 마을의 형태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가축양식은 로앙 쓰삐언(Loang Spean)의 거주자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중부
캄보디아의 쌈롱 쎈(Samrong Sen)지역은 선사시대 세 번째 거주지로 기원전 1500년경이다.
 
1세기-8세기
 
기원 후 1-8세기 무렵의 캄보디아에서는 토착민들의 지속적인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1세기 경에는 해안과 계곡 지역에
정착지가이루어지면서 쌀 경작과 돼지와 물소의 가축, 요리를 위한 토기, 물 저장소 등이
등장했으며종교적으로는 애니이미즘과 땅과 조상에 대한 숭배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 무렵에는 바다를 통한 중국의 교역로 개척이 이루어 졌으며 인도 역시도 중국과의
바다를 통한 상업적인 루트를 개발하기 위해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영역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상업선은 인도의 동부해안을 출발해 벵갈만과 말레이반도의 서부해안을 지나게
된다.
 
말레이반도 서부해안부터는 태국만(Gulf Of Thailand)의 서부해안 육로를 지나 중국
남부지역의 해안으로 상품이 이동하게 되는데, 동남아지역은 당시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루트의 저장소 역할로도 이용됐다.
 
행상루트의 이용이 증가하면서 인도와 중국간의 교역은 보다 나은 선적기술, 몬순 시기의
선택, 항해기술 등이 발전을 거듭하게 되어 인도의 사회, 종교적인 문화가 동남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인도의 문화가 크메르에 흡수되어 지는
인도화(Indianisation)를 겪게 된다. 무역이 발전하면서 해안을 따라 항구 주변에 정착지가
형성된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 당시 초기 정착지인 옥에오(Oc-Eo)는 무역상들에 의해 메콩
델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 2-3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동전, 인도 보석, 불교 관련용품 등이 발견된 바 있는데, 이는 이 지역의 해양 무역
네트워크가 로마제국과 지중해 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3세기 경에는 남부 캄보디아와 남부 베트남 유역인 메콩 델타의 하류 지역에 최초의
인도화된 정착지가 동남아에 형성됐다. 이 지역의 정착인들은 몬-크메르(Mon-Khmer)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캄보디아 언어의 뿌리가 되었다.
 
기원 후 3세기 경은 크메르 제국 계승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의 기록에
나타난 동남아 지역 최초의 인도화된 정착지인 푸난(Funan)은 중국어의 브남(bnam)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프놈('언덕'이란 의미의 현재 크메르어)으로 발음되는 '산'이란 의미의
고대 크메르 단어와 일치한다.
 
중국 문서에 푸난의 신화적인 표현이 나타나고, 산스크리트와 크메르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남인도 왕조 콜라스(Cholas)의 왕인 브라만과 물에서 생활하며 땅을 지배하는
나가(Naga) 왕의 딸과의 결혼에 관한 신화이다. 참파(Champa)에서 발견된 3세기의
비문에도 새로운 왕국의 창시자 카우딘야(Kaudinya)가 나가 왕의 딸인 쏨마를 만나
결혼했다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크메르 버전에는 국가의 탄생의 신화를 통한 캄보디아 왕의 계보와 연관되어 진다. 크메르
전설에 의하면 크메르의 신화적인 조상인 까무(Kamu)로부터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그의
후손인 프레아 통(Phreah Thong)은 인도의 왕에게 추방되어 캄보디아로 항해를 했는데,
어느 날 밤 그는 아름다운 나기니(Nagini)를 물가에서 보고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나기니의 아버지인 나가 왕은 물을 삼켜 육지를 만들고 나라를 건설해 그들에게 선사하고
캄부자(Kambuja)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5세기 경에는 힌두교 통치자에 의해 인도문화의 영향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동남아에 뿌리내린 인도방식은 힌두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교, 산스크리트어의 유입으로
인한 글 쓰기의 탄생과 최초의 명각기법, 첨성학, 법제도, 문학, 왕권 등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6세기 경에는 정치적 권력의 중심이 내륙으로 이동하게 된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6세기의 전반부는 젠라(Zhenla, 또는 첸라 Chenla)로 불리는 새로운 국가가 나타났는데,
현재 남동부 라오스 지역의 메콩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젠라는 후에 푸난을 병합시켜
현재의 베트남 남부에서 중국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8세기 경, 젠라는 상上젠라와 하下젠라(혹은 육陸젠라와 수水젠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상 젠라는 최초의 젠라 영토에 해당하는 남부 라오스의 메콩강 지역에서 똔레쌉 북부
연안까지를, 하 젠라는 이사나푸라(Isanapura)에 수도를 정하고 똔레쌉 동부 유역을
통치하였다가 앙코르시기의 직전인 9세기 초기에 멸망한다.
 
당시에는 푸난과 젠라 외에도 여러 도시국가들이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국가로 바로 이 두 나라가 꼽히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푸난과 젠라의 왕조가
크메르 문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앙코르 시기: 9세기-15세기
 
캄보디아 역사 중 일반적으로 서기 802년에서 1432년까지를 앙코르시기라고 한다. 이는
자야바르만(Jayavarman) 2세가 의식을 집행하여 자신을 우주의 군주로 임명한 때부터
메콩강 동부 지역인 바싼(Basan)에서 1434년 캄보디아 남부의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겨
앙코르에서 크메르로 이름이 바뀌면서 막을 내린다. 이 당시에는 크메르 제국의 영토와
문화적 역사적 건설들이 방대하게 이루어졌다.
 
앙코르의 창시자인 자야바르만 2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다만 스독 깍 톰(Sdok Kak Thom)에서 발견된 11세기의 비문에
최초의 왕인 자야바르만 2세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비문에 따르면 그는 캄보디아로
돌아오기 전 인도네시아의 사이렌드라스(Sailendras) 왕조의 법정에 서 일정시간을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후에 작성된 아랍 상인의 기록에 사이렌드라스 왕조가 강에서부터 수도까지 크메르를
공격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문헌으로 보면 라젠드라바르만(Rajendravarman)1세의
아들인 어린 왕이 참수형을 당하고 크메르 제국은 사이렌드라스 왕조의 속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자야바르만 2세는 당시의 공격으로 인해 인도네시아로 옮겨져
수감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야바르만 2세가 인도네시아에서 캄보디아로 돌아온 시기는 아직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지만, 대부분 790년 또는 그 이후로 보고 있다. 그는 군사력을 이용해
영토를 확장하고 작은 공국들을 통합해 인드라푸라(Indrapura)에 수도를 정한다.
 
그 후 세 차례 거점을 옮겼는데, 이는 식량을 원활히 확보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한 지역이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 현재의 롤루오스 Roluos)로, 앙코르 제국
이전에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다.
 
9세기 초반에 자야바르만 2세는 수도를 앙코르 톰의 동북부 지역인 마헨드라파르바타
산(Mt. Mahendraparvata, 현재의 프놈 꿀렌 Phonom Kulen)으로 다시 옮기고 자신을
우주의 지배자라고 명명한다. 서기 802년의 이 역사적인 사건은 크메르 국가의 통합,
그리고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앙코르시기로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자야바르만 2세는 새로운 종교적인 신앙인 데바라자(devaraja)를 설립한다.
그리고 그 후 곧바로 수도를 롤루오스로 다시 이전하였는데, 이곳은 그가 사망한 850년
까지 수도 역할을 하였다.
 
자야바르만 2세 이후의 왕들은 앙코르 제국의 통합과 확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었는데,
비문에 의하면 앙코르 기간동안 39명의 왕의 이름이거명되고 있다. 이 중 7명의 왕이
의미 있는 업적들을 남겼다고 평가되어 앙코르 문명에서 중요시되고 있다.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1/통치기간: 877-889년)는 사원의 산(바꽁 Bakong)의
건설을 시작했고, 선조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사원(프레아 꼬 Preah Ko),
수도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에 바라이(baray)와 인드라땃까(Indratatka)를 건설한다.
 
그의 아들 야소바르만 1세(Yasovarman 1/통치기간:889-900년)는 롤루오스에
롤레이(Lolei)를 건설하는데, 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건설한 커다란 바라이 중앙의 섬에
건설된 것으로 조상들을 기념하기 위한 사원이다. 또한 그는 10세기 초반을 제외한 500년
간 앙코르의 수도였던 야소다라푸라(Yasodharapura)로 수도를 이전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언덕에 사원의 산인 프놈 바켕(Phnom Bakheng)과 프놈 복(Phnom Bok),
프놈 끄롬(Phnom Krom) 같은 작은 사원들을 건설한다. 그가 건설한 사원의 산 동쪽에
거대한 저수지인 야소다라타타카(Ysodharatataka, 동 바라이)도 건설한다.
 
두 명의 아들이 야소바르만 1세의 뒤를 이은 뒤 등장한 자야바르만 4세
(통치기간: 928-942년)는 서기 928년, 앙코르의 동북부에 다른 수도인 꼬꺼(Koh Ker)를
형성해 20년 간 통치한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의 기록이 담긴 조각이 현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조카 라젠드라바르만 2세(통치기간:944-968년)는 944년, 수도를 야소다라푸라
(Yasodharapura)로 옮겨 제국의 통치를 강화한다. 그는 두 개의 위대한 사원인동 메본
(East Mebon)과 쁘레 룹(Pre Rup)을 건설했으며 참파를 공격하여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자야바르만 5세(통치기간: 968-1001년)는 어린 나이에 왕에
등극하였고, 환상적인 건축물 반띠아이 쓰레이(Banteay Srei)와 장엄한 사원
따 께오(Ta Keo)를 남겼다.
 
다음에 등장한 중요한 왕은 수리아바르만 1세(통치기간:1002-1050년)이다. 그는 태국
남부의 나껀 씨 탐마랏(Nakorn Sri Thammarat) 지역의 왕족 혈통으로, 정부 형태를
강화시켜 내부적인 안정을 꾀하고 연속적인 전쟁을 통해 태국만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1025년에는 태국 남부의 몬 왕국을 점령하고 루워(Louvo, 현재의 롭부리 Lopburi)에
크메르 중심지를 설립해 제국의 영향력을 하 메남(Lower Menam)까지 확장시킨다.
이 시기는 크메르 영토가 가장 많이 확장됐던 때 이기도하다.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왕들의 짧은 통치가 몇 번 이어진 후 등장한 수리아바르만
2세가 1113년 왕좌에 올라 1150년까지 통치한다. 그는 크메르 통치자 중에서도 위대한
왕 중의 한 명으로,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앙코르 왓을 건설하였다
 
(앙코르 왓의 회랑에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두 번 등장하는데, 코끼리 뒤에 서서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는 장면과 정교하게 조각된 왕좌에 앉아 있는 장면이다). 그는 송나라에
대사를 보내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성립시켰다. 그의 통치 후기에 발생한 참족(Chams)과의
전투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중요한 왕은 자야바르만 7세(통치기간: 1181-1201)이다. 그가 건설한
유적, 도로, 교량은 크메르를 통치한 모든 왕들이 만든 숫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는
마하야나 불교의 신봉자로, 그의 건축물에는 종교적인 상징들이 잘 나타나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인 1177년, 크메르 역사상 최악의 패전기록으로 남아있는 참족의
해상공격이 발생하였다.
 
참족은 강력한 해군을 이용하여 캄보디아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4년 간 캄보디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는 참과 전쟁을 벌여 다시 수도를 다시 탈환하고
55세의 나이에 왕에 등극해 40년 이상 통치하였다. 그는 1190년 참족을 침공해 그들의
왕을 앙코르에 수감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한 후 1203년에서
1220년까지 캄보디아는 다시 참파(Champa)에 합병되었다.
 
자야바르만 7세 통치 하에 이루어진 참족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바욘(Bayon)사원의 회랑
내 부조에 잘 묘사되어 있다. 훌륭한 군사 지도자 역할 이외에 자야바르만 7세는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베트남의 해안에서 미얀마의 바간(Bagan)과 라오스의
비엔티안(Vientiane/위앙짠), 말레이 반도까지 확장시켰다.
 
자야바르만 7세 사망이후 수명의 후계자들은 별다른 유적을 건설하지 못했지만 앙코르의
수도는 13세기 말까지 번영을 이룬다. 비슷한 시기에 불교가 경쟁자인 힌두교로 변화되는
과정에 앙코르에 묘사된 불교 이미지들이 손상되기도 한다.
 
인드라바르만 3세(Indravarman 3/통치기간:1295-1307) 동안은 테라바다 불교가
캄보디아 종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1350년, 태국지역의 아유타야(Ayuthaya)왕국이
앙코르를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인드라바르만 3세 이후 앙코르를 통치한 왕에 대한 이름과 시기는 명확하게 남겨져
있지 않고 있는데, 앙코르는 1432년까지 수도 역할을 하다가 프놈펜 지역으로 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앙코르 시대의 여러 왕들은 강력한 힘으로 동남아 지역에서 크메르
제국의 지배력을 과시했다.
 
주변 국가의 전성기와 지역
 
태국은 앙코르의 주변국가들 중 앙코르의 영토를 지속적으로 침범하는 나라였다.
13세기에 태국 중북부 지역에 태국 최초의 국가인 쑤코타이(Sukhothai)가 성립됐으며
비슷한 시기에 란나(Lanna)왕조의 공국(公國)이 북부 태국인 치앙마이 지역에 생겨났다.
그리고 14세기 중반, 짜오프라야 강 유역을 지배하는 아유타야 왕조가 탄생한다.
 
아유타야 왕조가 성립되기 100년의 기간은 태국이 동남아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시켜가던 시기로, 현재 태국의 영토와 거의 비슷한 거의 비슷한 크기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유타야는 버마의 침략을 받기 전인 1767년까지 동남아지역에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태국은 14세기에 앙코르로 지속적인 침입을 했는데, 두 국가 간의 전투는 1431년까지
백년동안이나 이어진다. 태국은 크메르를 완전하게 지배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앙코르 톰을 공격받은 크메르는 수도를 프놈펜으로 이전하게 된다. 16세기와 18세기에는
수도를 롭부리와 우동(Udong)으로 일시적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앙코르는 완전히 외부의 지배 하에 놓인 적은 없다. 앙코르 왓의 경우 15세기와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승려들에 의해 유지된 적이 있을 뿐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던 앙코르 왕궁도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는 하지는 못했다.
 
앙코르의 주변국가들 중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태국이었다. 그런데, 앙코르는 적의 공격을
받기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수도로서 적합성을 잃고 있었다. 또한 인력의 감소로
중앙통제식 시스템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게다가 크메르인들도 제국의 엄격한
통제에 대한 저항을 하기 시작했으며, 중앙통제가 약화되면서 봉신들의 연속적인 독립이
이루어졌다.
 
많은 인구의 유지 또한 농업 기반의 압력으로 작용하였고, 가뭄등의 기후적인 요소 역시
제국의 통합을 약화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그리고 14세기와 15세기 초반 캄보디아와
중국의 교류로 인한 해상교역의 증가로 프놈펜이 해상교역을 위한 적합한 장소로
발전되어졌다.
 
또한 새로운 종교인 테라바다 불교가 13세기에 동남아에 유입되면서 기존 종교의
세력은 약해지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크메르 통치자가 15세기 초기에 남동부로 이동해
프놈펜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왕국은 여러모로 변화하게 된다. 국가와 국민들의 통합과
행정을 위한 새로운 방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16세기-19세기
 
앙코르의 유적은 16세기 초반부터 서방세계에 자주 보도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
네덜란드에 의해 수마트라에서 쫓겨나 캄보디아의 피난시설로 이동한 포르투갈인들이
앙코르를 본 최초의 서양인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후 중국, 일본, 아라비아, 스페인, 포르투갈의 국제 무역상들이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과 롭부리에 거주했으며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이 뒤를 이어 거주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앙코르에 관한 기록은 포르투갈 작가 디에고 도 쿠또(Diego do Couto)가
남긴 것이다. 여기에는 16세기 중반 캄보디아 왕이 코끼리 사냥하는 동안 앙코르를
발견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 여행자가 남긴 또 다른 기록에서도 17세기 초반으로 쿠또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1601년에 마르셀로 드 리바데니르(Marcelo de Ribadeneira)라는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의 로마 제국이 건설한 고대 도시 유적이 캄보디아에 남아있다"고
했으며, 1603년 스페인 선교사 가브리엘 끼로가 드 싼 안토니오(Gabriel Quiroga de
San Antonio)가 남긴 저서에는 "1570년에 도시는 빛이 바래었으나, 현지인들에게
발견되거나 이야기 된 적이 한번도 없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프랑스 선교사인 페레 쎄쉐브루엘(Pere Chevruel) 1672년에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부터
8일이 걸리는 거리에 매우 훌륭한 고대의 사원이 있다. 사원은 온코(Onco)라고 하는데,
로마의 세인트 피터처럼 매우 유명한 곳이다."라고 썼다.
 
네델란드인들 또한 16세기와 17세기에 동남아 지역의 상업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으며
헨드릭 인디직(Hendric Indjick)같은 상인들이 앙코르에 관한 기록을 남긴바가 있다.
 
일본인은 1632년, 직접 앙코르 왓의 사암에 조각을 남겼다. 앙코르 왓의 두 번째 층의
기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이 그린 가장 오래된 앙코르 왓의 자료는 통역가인
켄료 시마노(Kenryo Shimano)가 1632년에서 1636년 사이에 앙코르 왓을 여행한 후
사원의 약도이다.
 
그는 앙코르라는 이름이 아닌 인도의 불교 유적인 제타바나-비하라(Jetavana-vihara)라고
약도에서 표기하고 있으나 후에 서양 학자들에 의해 앙코르 왓을 배치도를 그린 것이라고
확인되어졌다.
 
1850년대에 기록된 앙코르와 관련된 서양인들의 글들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박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가 캄보디아 방문 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유럽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원래 스코틀랜드인 부인과 함께 아시아에서
살기 위해 여행계획을 세웠는데, 운이 좋게도 런던의 왕실 지질학회의 후원을 얻어
1858년 4월에 싱가폴을 거쳐 9월에 싸얌(태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개월 후부터 1860년 4월까지 여행을 계속 하였는데, 그 중 2개월을 앙코르를
포함한 캄보디아에서 보냈다. 그는 앙코르 왓에서 측정, 조사를 하여 세부사항을 기록해
놓았고, 메콩강 일대의 라오스와 북동부 싸얌 대한 조사까지 포함한 지도를 제작했다.
무오는 1861년 35세의 나이로 라오스 루앙 프라방에서 사망할 때까지 조사를 지속했으며,
그의 기록은 1864년에 그의 부인과 형제에 의해 출판됐다.
 
무오의 책이 출판되었을 당시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때로, 프랑스는
1864년부터 밧땀방(Battambang)과 씨엠리업(Siem Reap)을 제외한 전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밧땀방과 씨엠리업은 1907년 프랑스와 싸얌간에 체결 된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소유가
되었고, 그 후 2차대전 시 싸얌에 재귀속됐던 일부 기간 외에는 계속 프랑스령 캄보디아의
영토에 속해있게 되었다. 반띠아이 쓰레이의 경우 앙코르 북동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태국이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1941년 일본의 중재 하에 캄보디아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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