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의 역사(2006.9.02 - 02:34)

  • 관리자
  • 조회 3967
  • 우간다
  • 2016.10.12 11:56
우간다에서는 14세기에 토착 왕국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바간다(Baganda) 왕국, 버뇨로(Bunyoro)왕국, 토로(Toro)왕국, 안콜레(Ankole)왕국, 버소가(Busoga) 왕국 등이 있었다. 이어지는 세기 동안 바간다 왕국이 지배적인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까지 우간다에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거의 없었으므로 바간다 부족은 복잡한 사회 계급 제도를 만들어낼 만큼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잉여 농산물을 생산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프리카 해안과의 교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접촉이 이루어진 것은 결국 19세기 중반 아랍 상인들과 유럽인탐험가들에 의해서였는데, 유럽인들은 상아와 노예를 찾아 왔던 것이다.

유럽 각국의 아프리카에서의 영역을 규정한 1890년의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 이후 우간다, 케냐, 잔지바르 군도(islands of Zanzibar), 펨바(Pemba)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식민지 관리들은 환금 작물로 커피와 목화를 도입하고 간접 통치 정책을 택해 여러 토착 왕국에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지만, 공직을 맡길 사람으로는 바간다 부족을 선호했다. 바간다 추장 수천명은 영국으로부터 거대한 토지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했다. 식민 통치 하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바간다 족이 지배하는 상업 영역에 접근할 수 없었던 다른 부족들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아콜리(Acholi)족과 랑고(Lango)족은 군대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로서 독립 후에 우간다를 산산이 분열시켰던 부족 간의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1950년대 중반 랑고 족 교사였던 밀톤 오보테(Milton Obote) 박사는 느슨해져 있던 연합 세력을 결집해 바간다 부족에게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 하에 1962년 우간다를 독립시켰다. 그러나 당시는 우간다가 독립을 성취하기에 별로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이웃한 수단 남부, 자이레(현제의 콩고), 르완다에서 내전이 진행중이었고 피난민들이 우간다로 밀어닥쳤다. 또한 오보테가 카바카(kabaka, 바간다 부족의 왕)와 권력을 나눌 마음이 없다는 것도 곧 명백해졌다. 오보테는 재빨리 움직여 내각 장관 중 다수를 체포하고 군사 책임자였던 이디 아민에게 카바카의 궁전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보테는 대통령이 되었고 바간다 군주제는 폐지되었으며 이디 아민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오보테가 모든 권력을 대통령이 독점하도록 헌법을 고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US$ 500만에 달하는 외국인 자산을 보상 없이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1969년, 아민은 금융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압력이 가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오보테는 망명했고 이로서 우간다 최초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모든 정치 활동은 신속히 금지되었고 군대에는 현 체제에 반대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누구나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후 8년 동안 줄잡아 300,000명의 우간다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다수는 아주 참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아민의 주요 공격목표는 콜리 족과 랑고 족, 전문 직업인들과 70,000명에 달하는 아시아계 주민들이었다. 아시아계 주민 중 대다수는 1912년경부터 우간다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다른 영국 식민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1972년 아시아계 주민들은 90일 내에 입은 옷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우간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동안 경제는 무너졌고 사회 기본 시설은 퇴락했다. 군인들은 고기와 상아, 가죽을 얻기 위해 수가 많던 야생동물을 무자비하게 사냥했으며 관광 산업은 완전히 붕괴 상태가 되었다. 국경을 넘는 피난민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었다. 인플레이션이 1000%에 달했고 결국은 국고가 텅 비어 군인들에게 봉급도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군대가 부족간의 다툼으로 분열되고 불안해지자 아민은 전환점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바보스럽게도 탄자니아와의 전쟁을 선택했다. 탄자니아군은 우간다 군대를 가볍게 물리치고 우간다 중심부까지 진격해왔다. 12,000명 가량의 탄자니아 군인들이 우간다의 재건을 돕고 법과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우간다에 남아 우간다인들을 괴롭혔다.

1980년 우간다에서는 군정 통치가 시작되었고 군정은 그 해 말로 우간다 대통령 선거일을 확정했다. 탄자니아에 망명해 있던 오보테가 우간다 전역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돌아와 노골적으로 조작된 선거에서 승리를 차지했다. 아민과 마찬가지로 오보테도 특정 부족을 편애했다. 남부 부족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공직자, 군인, 경찰 중 대부분이 북부 부족에 속하는 오보테의 지지자들로 교체되었으며 다시 한번 감옥은 가득 찼다. 잔악 행위에 대한 증언이 나라 전역에서 터져 나왔고 시체 구덩이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1985년 중반 오보테는 티토 오켈로(Tito Okello)가 주도한 군대의 쿠데타로 물러났다.

1980년 오보테가 대통령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정 부족에 편중된 오보테 정부에 반대하는 게릴라 군대가 우간다 서부에서 조직되었다. 이 군대를 이끈 사람은 요웨리 무세베니로, 그는 아민의 통치기간 동안 탄자니아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27명으로 시작했던 게릴라 세력은 20,000명에 달하게 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10대의 고아들이었다. 처음에는 NRA(National Resistance Army)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게릴라 세력에게 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오보테가 축출되고 오켈로가 정권을 잡을 무렵 NRA는 우간다 서부의 꽤 넓은 지역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NRA와 오켈로 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치열하게 계속되었고 1986년 1월이 되자 오켈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NRA는 세력을 총집궐해 수도를 점령했다.

무세베니는 마르크스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지도자임이 드러났으며 내각에 골수 보수인사들을 상당수 임명하고 우간다의 영향력 있는 카톨릭 공동체를 다시 조직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300,000명 가까운 우간다 피난민들이 수단 국경을 넘어 우간다로 돌아왔다. 경제가 나아지기 시작했고 원조와 투자도 돌아왔다. 무세베니는 1994년의 민주적인 '무정당' 선거에서 승리했고 1996년에도 재선되었다. 1990년대 후반 무세베니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다양한 반정부 반역 세력이 많은 북부 지역인데, 이러한 반정부 세력으로는 수단의 이슬람 정부와 연합한 로드 레지스탕스 아미(Lords Resistance Army) 같은 기괴한 기독교 집단이나 이디 아민 시절의 전(前) 장관이 이끄는 웨스트 나일 뱅크 프론트(West Nile Bank Front) 등이 있다. 오늘날 우간다의 에이즈 및 HIV 감염 정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대충 어림잡아 150만 정도의 우간다인이 감염되어 있는것으로 보인다. 마을 중에는 감염률이 너무 높아 네 명 중 한 명은 감염상태인 곳도 있다.

1996년의 선거는 우간다가 부흥의 길로 나가는 마지막 단계였던 것으로 보이며, 우간다의 악명 높은 인권 상황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우간다를 방문했다. 1999년 8월 우간다는 콩고 평화 협약에 서명했다.




*2006.9.02 - 02:34의  쓰여진 글이나
무분별한 댓글로 인해 삭제 후 재작성하였습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북마크

RECENT POSTS

HOT HIT

게시물이 없습니다.

HOT COMMENTS

게시물이 없습니다.

RECENT GALLERY